새벽잠의 미스테리에 관하여
자주는 아니지만 새벽에 문득 잠이 깰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아직 새벽이군' 같은 식으로 다시 자는 경우가 많지만 지지리도 민감한 수면 습관을 가지고 있는 나의 경우는 다시 자는게 곤욕이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자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지루하다) 뒤척뒤척 거리다가 독서를 한다던지, 이른 산책을 나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경우 나의 충실한 DNA는 내 신체에 주어진 수면 시간의 엄수를 위해서 저녁동안 나를 반코마 상태에 빠뜨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바로 "수면 시간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데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점. 한참 산책을 하다가 "이제 들어가 볼까?"하고 시계를 봐도 30분도 지나지 않았거나 책을 골똘히 읽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시간을 확인해도 시간이 널널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밤을 새는 경우 고개만 숙였다가 든 것 같은데도 30분이 허망하게 날라가는 면에 비해서 밀도가 빡빡한 시간활용이다. 약간 비유를 써보자면 밤새는 시간은 허깨비마냥 스르륵 사라지는 데 반해 새벽 시간은 흘러가는게 직접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리달까.
어쨌튼 이런 긴 남는 시간 동안 한 일 중에서 읽은 책이나 산책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몇가지 적어보자면. 장기간 동안 나를 멍때린 상태로 만들었던(약간 속된 표현) "상실의 시대", "전도서를 위한 장미", 밥 굶은 사람마냥 정신없이 계속 읽어내려갔던 "내 이름은 콘라드", "요재지이", 아주 드물게 잡는 고전인 "세설신어" 같은 책이 있다(요재지이도 고전이긴 하지만 이건 쫌 다른 이야기). 또, 산책 으로 치자면 더워서 반팔 차림으로 휘적휘적 대면서 걸어다닌 7월 중순 쯤의 산책과 이와 대조적으로 추워서 코끝이 루돌프 마냥 붉게 물든 작년 11월 쯤의 산책을 꼽을 수 있다. 어제 먹은 점심도 가물거리는 금붕어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나에게 있어 이건 축복 급의 기억이다.
문제는 이런 생산성 최강의 시간대를 만드려고 일부러 잠을 일찍 자거나 하면 오히려 더 퍼 자버리거나 아침부터 헤롱헤롱한 상태로 깨어난 다는 점. 인체의 신비라고 치부하고 있긴 하지만 필요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꼭 한가할 때 이런다는 점에서는 참 서글픈 일이다.
Ps. 이 글도 지금 밖에서 노트에다 끄적거리고 있다. 새벽 시간대지만 여름인지 날이 꽤 밝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